유동(流動)의 철선-기억의 소환 형의 유영-김창환 작품에 투영된 미적 알고리즘 분석. 홍경한(미술평론가)
유동(流動)의 철선-기억의 소환 형의 유영
-김창환 작품에 투영된 미적 알고리즘 분석
홍경한(미술평론가)
1. 작가 김창환의 선조(線彫)는 숭숭 뚫린 몸을 서로 의지한 채 허공에 떠 있거나 넓은 공간 어딘가에 놓인다. 대개 거대한 몸집을 한 그의 작품들은 자유롭게 유영하면서도 고착되어 있고, 멈춰 있는 듯 옮겨 다니는 특징을 갖는다. 작가는 드로잉 조각 혹은 선(線)조각(line sculpture)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유동(流動)의 철선으로 무형의 비물질적인 기억들을 소환하고, 현재와 과거를 교직하며 일련의 소재를 활용한 공간에 감각적으로 내용을 대입-발현시키는 직조의 기술을 통해 현실과 권력, 개인의 서사 등을 심어놓는다.
2. 김창환의 작업들은 대개 스테인리스스틸이나 철근으로 만들어진다. 매끈한 듯 거칠고, 투박하지만 부드러운 금속이 그의 작품 뼈대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철근은 일반적 선조에서 엿보이는 조형적 요소로써의 소재, 관념으로서의 재료가 아니라 작가의 삶에 있어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대리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과거 수리공이나 공사장 노동자로 생활하며 독학으로 미술을 배우던 시절 마주했던 친숙한 자재들이 오늘날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주요 재료로 안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재료들은 김창환 작품의 조형을 구축하는 기초이기도 하지만, 그 보단 지난날을 환기시키는 매개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며 오늘의 그를 존재하게 한 물리적 언표라 해도 무리는 없다.
3. 오랜 시간 여러 다양한 작업을 해왔으나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상어’나 ‘낙타’와 같은 여러 동물의 형상이다. (2013) 등의 기하학적인 도형(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패턴 등)이나 (2013)처럼 인간의 신체를 표현한 작품들, (2013), (2013) 등과 같이 일상 속 사물을 다룬 작품들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상어’ 연작(Shark series)은 김창환의 트레이드마크와 같다.
실제로 작가는 금속이라는 차가운 재료가 지닌 물질 자체의 특수한 성질과 내적 상황을 곧잘 ‘상어’로 매칭 시키는데, 여기서 언급한 내적 상황이란 1차적으로 다윈이즘(Darwinism) 아래 놓인 인간사회의 구조와 권력을 가리킨다. 피나는 노력이 반드시 긍정적인 미래를 보장하는 것도 아닌 현실, 빈부와 계급을 비롯해, 풍요와 빈곤, 획득과 손실, 절대가치와 잉여가치 등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포식자인 ‘상어’는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권리와 힘이자 인간사회에 내재된 허무한 심리와 무의미함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기표이기도 하다.
물론 생태계 상위에 있는 ‘상어’는 작가 자신을 비롯한 인간의 삶과 욕망을 지정하기도 한다. 즉, 물 속 미량의 산소를 얻기 위해 입을 벌린 채 계속 움직여야만 하는 상어의 모습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향해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투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그 결과가 공허하고 패배적일지라도 부레 없이 지속적으로 지느러미를 버둥거려야만 하는 인간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창환의 상어는 단순히 동물의 형상을 옮긴 것이라기 보단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익사’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우리의 모습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짙게 녹아 있다 해도 그르지 않다.
4. 상어가 권력의 상수, 인간의 욕망, 자유에 대한 간절한 바람 등을 드러내는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면 2015년 근작인 <낙타(camel)> 연작은 일정한 프레임(권력, 자본 등의) 속에서 ‘질주’하는 인간들을 은유한다. 모든 포박으로부터의 자유,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한 채 진정한 자신을 위한 상태를 원하지만 결코 실현하기 어려운 삶의 보편성을 느릿한 실제와는 달리(전혀 자연스럽지 못하게) 뛰어가는 낙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낙타는 듀오 아티스트 알로라 & 칼사딜라(Allora & Calzadilla)의 (2005)나, 베를린더 더브라위케어(Berlinde de Bruyckere)의 등의 느긋하거나 절망적인 슬픔이 배어 있는 동물과는 달리 비구상적 구상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 차이가 있다. 노골적 혹은 직접적인 투사 대비 훨씬 서정적이라는 점, 상상력을 증대시킨다는 점도 여타 작품들과 거리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상어든 낙타든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유려한 곡선미가 인상적인 간략한 선으로 함축하여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5. 사실 그가 철선(鐵線)을 통해 만든 동물은 인간이란 자연이고 자연이란 곧 인간이라는 작가적 세계관 혹은 미적가치관을 나타낸다. 이것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 하늘과 땅의 중간계, 현실감과 이상성의 가운데에서 부유한 채 인간사회와 속성에 관한 반응의 문제를 말한다.(형상이 허공에 내걸림으로써 대상의 공간차지를 통한 여백의 향유 및 순환의 이미지를 생성시키고 또 다른 자연적 요소로 인해 공간은 연계 및 확장되어 예견되지 못한 새로운 미의식을 창출한다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특히 동물들은 그 자체로 사물에 투영된 인간과 사회의 거침없는 욕망을 개별화하는 알고리즘이며, 각각의 동물은 우리네 내부에 숨겨진 상징성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고 시공에 대한 목적성 서술을 잇는 매개로 작동한다. 물론 우린 그 선이 부여한 패러다임 안에서 형식적·개념적으로 조각의 층위와 폭을 넓혀가고 있는 작가의 현재를 목도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6. 이처럼 작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자연체들을 공간에 배치하여 시각적 풍만함과 안정감을 주는 반면, 또 다른 부분엔 추상적 질서의식을 투사함으로써 자연스러운 ‘틈’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 틈에는 언제나 우리 사회에 놓인 권력의 문제와 자본의 문제, 계급과 노동의 문제 등이 질서와 혼돈 아래 빼곡히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편안하지만 긴장감을 조성하고 지극히 지각적인 구상이지만 그의 정신과 기법은 추상이 되는 수순, 또한 추상인가하면 다시 자연형태를 무시하지 않은 비구상의 세계에 머무르는 길에 서 있음을 가리킨다. 김창환은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삶의 자유로움을 다시 한 번 되묻고 있으며, 시공을 넘나드는 화제와 미감을 통해 현대인들의 초상을 읽도록 유도한다.
7. 높은 인지성을 지닌 형상에 자신만의 기억과 철학을 연결해 사고의 점층을 드러내고 소소한 사물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시선과 현상에 관한 고찰을 담보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획득하고 있는 김창환은 오늘도 물성(物性), 그 자체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삶과 사회구조를 소재로 끌어들여 공간과 연결된 열린 형태를 찾기 위한 표면적 유희를 시도한다. 이는 1) 시각과 선-볼륨-매스(mass)의 상호작용, 2) 보는 대상과 인지 대상 간에 존재하는 보편적, 즉시적 체감되는 이미지를 이용한 내적 격정과 기억의 소환, 3) 유형의 변주를 통한 친숙하나 씁쓸한 현실의 동시성을 나타낸다.
나아가 4) 공중에 떠 있는 일련의 연작들이 우리 사회에 놓인 프레임을 논하고, 바람에 의해 유동하는 형상과 선조 사이를 흐르는 리듬, 차갑게 혹은 희망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적 시각으로 인해 구상적 추상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각인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5) 그러면서도 고유의 강도와 유연성, 냉정한 여운(餘韻), 이성적이고 냉정한 성질을 지니는 금속을 통해 공간 구성적, 실용적, 장식적, 공간 환기적인 상태에 ‘사물과 사유주체 간 무형의 촉발’을 능동적으로 완성한다는 사실은 김창환 작업의 가능성을 담보한다. 특히 6) 가시적으로 확연한 매질(媒質)로 재현된 조형적 단면과 우리가 직접 체감하는 지각 단면 간 괴리를 확대하거나 혼재시킴으로써 인식적 실재와 개념적 실재가 어떤 방식으로 상충, 공존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시각이상의 미학적 가치를 대변한다.
8. 그런데 필자는 성남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처음 그의 작품을 접했을 당시 작가가 언급하는 모든 것엔 자연과 생명, 정체와 역동, 순간적 지연과 비상의 율동이 녹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경험을 토대로 한 삶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함, 나약하게 끌려가는 수동적인 인간 양태를 표현하려는 것은 아닌지 유추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자체에 대한 어떤 의미부여에 앞서 김창환은 그 속에 내재되어 있어야할 우리 인간의 깊은 양식과 연결되는, 이를테면 휴머니티의 동경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일련의 작품으로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가능하지 싶다.■
-김창환 작품에 투영된 미적 알고리즘 분석
홍경한(미술평론가)
1. 작가 김창환의 선조(線彫)는 숭숭 뚫린 몸을 서로 의지한 채 허공에 떠 있거나 넓은 공간 어딘가에 놓인다. 대개 거대한 몸집을 한 그의 작품들은 자유롭게 유영하면서도 고착되어 있고, 멈춰 있는 듯 옮겨 다니는 특징을 갖는다. 작가는 드로잉 조각 혹은 선(線)조각(line sculpture)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유동(流動)의 철선으로 무형의 비물질적인 기억들을 소환하고, 현재와 과거를 교직하며 일련의 소재를 활용한 공간에 감각적으로 내용을 대입-발현시키는 직조의 기술을 통해 현실과 권력, 개인의 서사 등을 심어놓는다.
2. 김창환의 작업들은 대개 스테인리스스틸이나 철근으로 만들어진다. 매끈한 듯 거칠고, 투박하지만 부드러운 금속이 그의 작품 뼈대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철근은 일반적 선조에서 엿보이는 조형적 요소로써의 소재, 관념으로서의 재료가 아니라 작가의 삶에 있어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대리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과거 수리공이나 공사장 노동자로 생활하며 독학으로 미술을 배우던 시절 마주했던 친숙한 자재들이 오늘날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주요 재료로 안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재료들은 김창환 작품의 조형을 구축하는 기초이기도 하지만, 그 보단 지난날을 환기시키는 매개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며 오늘의 그를 존재하게 한 물리적 언표라 해도 무리는 없다.
3. 오랜 시간 여러 다양한 작업을 해왔으나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상어’나 ‘낙타’와 같은 여러 동물의 형상이다. (2013) 등의 기하학적인 도형(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패턴 등)이나 (2013)처럼 인간의 신체를 표현한 작품들, (2013), (2013) 등과 같이 일상 속 사물을 다룬 작품들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상어’ 연작(Shark series)은 김창환의 트레이드마크와 같다.
실제로 작가는 금속이라는 차가운 재료가 지닌 물질 자체의 특수한 성질과 내적 상황을 곧잘 ‘상어’로 매칭 시키는데, 여기서 언급한 내적 상황이란 1차적으로 다윈이즘(Darwinism) 아래 놓인 인간사회의 구조와 권력을 가리킨다. 피나는 노력이 반드시 긍정적인 미래를 보장하는 것도 아닌 현실, 빈부와 계급을 비롯해, 풍요와 빈곤, 획득과 손실, 절대가치와 잉여가치 등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포식자인 ‘상어’는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권리와 힘이자 인간사회에 내재된 허무한 심리와 무의미함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기표이기도 하다.
물론 생태계 상위에 있는 ‘상어’는 작가 자신을 비롯한 인간의 삶과 욕망을 지정하기도 한다. 즉, 물 속 미량의 산소를 얻기 위해 입을 벌린 채 계속 움직여야만 하는 상어의 모습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향해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투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그 결과가 공허하고 패배적일지라도 부레 없이 지속적으로 지느러미를 버둥거려야만 하는 인간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창환의 상어는 단순히 동물의 형상을 옮긴 것이라기 보단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익사’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우리의 모습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짙게 녹아 있다 해도 그르지 않다.
4. 상어가 권력의 상수, 인간의 욕망, 자유에 대한 간절한 바람 등을 드러내는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면 2015년 근작인 <낙타(camel)> 연작은 일정한 프레임(권력, 자본 등의) 속에서 ‘질주’하는 인간들을 은유한다. 모든 포박으로부터의 자유,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한 채 진정한 자신을 위한 상태를 원하지만 결코 실현하기 어려운 삶의 보편성을 느릿한 실제와는 달리(전혀 자연스럽지 못하게) 뛰어가는 낙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낙타는 듀오 아티스트 알로라 & 칼사딜라(Allora & Calzadilla)의 (2005)나, 베를린더 더브라위케어(Berlinde de Bruyckere)의 등의 느긋하거나 절망적인 슬픔이 배어 있는 동물과는 달리 비구상적 구상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 차이가 있다. 노골적 혹은 직접적인 투사 대비 훨씬 서정적이라는 점, 상상력을 증대시킨다는 점도 여타 작품들과 거리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상어든 낙타든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유려한 곡선미가 인상적인 간략한 선으로 함축하여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5. 사실 그가 철선(鐵線)을 통해 만든 동물은 인간이란 자연이고 자연이란 곧 인간이라는 작가적 세계관 혹은 미적가치관을 나타낸다. 이것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 하늘과 땅의 중간계, 현실감과 이상성의 가운데에서 부유한 채 인간사회와 속성에 관한 반응의 문제를 말한다.(형상이 허공에 내걸림으로써 대상의 공간차지를 통한 여백의 향유 및 순환의 이미지를 생성시키고 또 다른 자연적 요소로 인해 공간은 연계 및 확장되어 예견되지 못한 새로운 미의식을 창출한다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특히 동물들은 그 자체로 사물에 투영된 인간과 사회의 거침없는 욕망을 개별화하는 알고리즘이며, 각각의 동물은 우리네 내부에 숨겨진 상징성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고 시공에 대한 목적성 서술을 잇는 매개로 작동한다. 물론 우린 그 선이 부여한 패러다임 안에서 형식적·개념적으로 조각의 층위와 폭을 넓혀가고 있는 작가의 현재를 목도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6. 이처럼 작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자연체들을 공간에 배치하여 시각적 풍만함과 안정감을 주는 반면, 또 다른 부분엔 추상적 질서의식을 투사함으로써 자연스러운 ‘틈’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 틈에는 언제나 우리 사회에 놓인 권력의 문제와 자본의 문제, 계급과 노동의 문제 등이 질서와 혼돈 아래 빼곡히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편안하지만 긴장감을 조성하고 지극히 지각적인 구상이지만 그의 정신과 기법은 추상이 되는 수순, 또한 추상인가하면 다시 자연형태를 무시하지 않은 비구상의 세계에 머무르는 길에 서 있음을 가리킨다. 김창환은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삶의 자유로움을 다시 한 번 되묻고 있으며, 시공을 넘나드는 화제와 미감을 통해 현대인들의 초상을 읽도록 유도한다.
7. 높은 인지성을 지닌 형상에 자신만의 기억과 철학을 연결해 사고의 점층을 드러내고 소소한 사물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시선과 현상에 관한 고찰을 담보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획득하고 있는 김창환은 오늘도 물성(物性), 그 자체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삶과 사회구조를 소재로 끌어들여 공간과 연결된 열린 형태를 찾기 위한 표면적 유희를 시도한다. 이는 1) 시각과 선-볼륨-매스(mass)의 상호작용, 2) 보는 대상과 인지 대상 간에 존재하는 보편적, 즉시적 체감되는 이미지를 이용한 내적 격정과 기억의 소환, 3) 유형의 변주를 통한 친숙하나 씁쓸한 현실의 동시성을 나타낸다.
나아가 4) 공중에 떠 있는 일련의 연작들이 우리 사회에 놓인 프레임을 논하고, 바람에 의해 유동하는 형상과 선조 사이를 흐르는 리듬, 차갑게 혹은 희망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적 시각으로 인해 구상적 추상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각인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5) 그러면서도 고유의 강도와 유연성, 냉정한 여운(餘韻), 이성적이고 냉정한 성질을 지니는 금속을 통해 공간 구성적, 실용적, 장식적, 공간 환기적인 상태에 ‘사물과 사유주체 간 무형의 촉발’을 능동적으로 완성한다는 사실은 김창환 작업의 가능성을 담보한다. 특히 6) 가시적으로 확연한 매질(媒質)로 재현된 조형적 단면과 우리가 직접 체감하는 지각 단면 간 괴리를 확대하거나 혼재시킴으로써 인식적 실재와 개념적 실재가 어떤 방식으로 상충, 공존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시각이상의 미학적 가치를 대변한다.
8. 그런데 필자는 성남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처음 그의 작품을 접했을 당시 작가가 언급하는 모든 것엔 자연과 생명, 정체와 역동, 순간적 지연과 비상의 율동이 녹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경험을 토대로 한 삶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함, 나약하게 끌려가는 수동적인 인간 양태를 표현하려는 것은 아닌지 유추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자체에 대한 어떤 의미부여에 앞서 김창환은 그 속에 내재되어 있어야할 우리 인간의 깊은 양식과 연결되는, 이를테면 휴머니티의 동경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일련의 작품으로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가능하지 싶다.■